‘발렌티노’ 파리패션위크 25 SS 패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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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노’ 파리패션위크 25 SS 패션쇼

민신우 기자 0 2024.10.02

 

 

이탈리아 럭셔리 오트 쿠튀르 브랜드 발렌티노가 파리에서 2025년 봄여름 발렌티노 파비옹 데 폴리(Valentino Pavillon Des Folies) 패션쇼를 열었다.

 

메종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이번 패션쇼는 유리처럼 깨지기 쉬울 정도로 취약한 인간의 존재와 아름다움의 관계, 나아가 인생에 있어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전하고자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한계의 감각에 노출되는 취약한 존재이다. 우리의 체중으로 인해 산산히 부서질 수 있는 거울 위를 발끝으로 살금살금 걷는다. 우리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을 헛디디거나 넘어질 위험이 없는 발걸음은 없다. 숨을 쉴 때마다 취약함이라는 그림자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다. 우리는 탈출구가 없는 일시적인 지평선 안에서 불안정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환경이 우리에게 현세적 차원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준다. 이 세상을 통과하는데 있어 시간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무한하게 펼쳐질 수 있다면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길 것인가?

 

따라서 존재의 길이가 제한된 것은 신경의학자 프랑클이 이야기했듯이 존재의 의미를 앗아가는 대신 의미 부여에 기여한다. 우리는 존재의 무한함이라는 비논리적 개념에 몰입하면서도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 의미를 선사하고 가치와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삶의 수수께끼를 헤쳐나가고자 하는 본능적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 보면 아름다움은 운명의 덧없고 모호한 본질에서 비롯되는 고뇌를 어루만져줄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이는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덧없는 파빌리온인 파비옹 데 폴리(Pavillon des Folies)’ 안을 항해하기 위한 닻과도 같다. 아름다움은 결코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변덕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몸의 온기를 지켜주며 편안함을 선사한다. 아름다움의 목적은 치유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취약성을 달래주고 현질의 무질서를 아물게 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작가 테오필 고티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어떤 필요의 논리에도 구애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언뜻 보면 목적이 없어 보인다. 화사한 색으로 피어난 꽃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그 찬란한 색채가 있기에 우리가 아는 고귀하고 섬세한 작업인 수분이 이루어질 수 있다. 꿀벌은 미각과 심미적 이성에 의존하여 지구 유전학을 위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 적극적으로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면서 알록달록한 형태들로 이루어진 미로 같은 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자연에는 쓸모없는 것이 없고, 쓸모없다는 개념 자체도 없다는 철학가 미셸 드 몽테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가 행복을 가꾸고자 아름다움을 사용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만들 때 또는 획일적이고 혼란스러운 존재의 흐름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무감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쁨의 상태로 황홀경에 빠 지는 기분이 든다는 걸 알고 있다. 이는 쉽사리 규정되지 않는 선동적 움직임으로서, 우리의 완전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충만함을 전파하는 놀라운 역할을 한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은 보편주의적이고 독단적이며 규범적인 신화가 아니다. 그 보다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주고 드러내는 무언가, 다시 말해 인간과 사물, 생명체 사이의 연결 고리를 단번에 보여주는 통찰을 깊이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을 전하고자 한다.

 

예술 작품이나 황홀한 우주를 감상하다 보면 뜻밖의 순간에 그런 느낌이 불쑥 찾아올 수 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빛, 젖이 가득한 가슴의 신성함, 섬세한 자수 드레스의 웅장함, 육신에 머무르는 영혼의 긴 여운, 허공의 장엄함, 사랑을 찾는 반딧불이, 젖은 흙내음, 오간자 러플 주름의 촉감, 도서관의 기적, 수채화의 섬세한 층들이 그렇다. 아름다움은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알레테이아라고 이름 붙인, 드러내고 밝히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그 놀라운 난입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땅이 흔들린다. 그러나 정확하게 지명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철학가 에메누엘라 세베리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몽상가의 궁극적인 위안으로서, ‘사물의 무력함을 바라보는 힘’, 우리가 무의미한 회색 지대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빛의 파동, 덧없음의 심연을 헤쳐나갈 수 있는 마법의 약, ‘파르마콘이 된다. 이는 우리가 허공을 떠다니게 해주는 가늘고 소중한 거미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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